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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의 영국 건축은 팔라디오 양식이라고 불리는 예기치 않은 경향으로 시작되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 팔라디오 건축의 부활 양식을 의미한다. 신고전주의보다 약 10년 앞선 1720년경부터 시작되었으며, 주로 영국 내에서 1760년경까지 계속되었다. 유럽 전역에서 18세기 역사주의의 첫 번째 형태로 여겨졌다. 이 양식은 당시 영국 상황의 산물이었다. 조지 1세가 왕위에 오르자 권력은 진보적인 휘그 정당으로 옮겨갔다. 중상주의, 합리주의, 산업기술, 부르주아주의 등 새로운 힘과 생산 방식에 기반을 둔 휘그당이 정권을 잡으면서 영국 사회 전반에 걸쳐 효율과 이성을 중시하는 현실주의 바람이 불었다. 그들은 이전의 휘그당 스타일인 바로크를 물리치고 그들의 진보적인 정치적 이상을 구현할 새로운 건축 양식을 발견하게 되었다. 바로크는 왕권 회복과 가톨릭 부활이라는 보수적 분위기를 대변하며 불합리하고 지나친 장식에 격분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정반대의 형태는 간결하고 절제된 특징을 가져야 했다. 고전의 원형적 순수성을 유지하고 기본에 충실하면서 합리적이어야 했다. 팔라디오의 구조는 합리성과 논리, 추상성이 강하기 때문에 이 표준에 잘 맞았다. 팔라디오 형식으로 결합한 건축가는 콜린 캠벨과 벌링턴 경이었다. 캠벨은 기호의 법칙이라는 미적 이론 운동을 주도했고, 영국 정서에 반하는 부자연스러운 허영심으로 바로크 건축의 지나친 장식을 비판했다. 그가 개인적으로 칼뱅주의자였다는 사실 또한 그러한 시작을 갖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벌링턴 경은 캠벨의 뒤를 이어 팔라디오 양식을 완성했다. 정식 건축가가 아니라 귀족 정치인이었으며, 미술, 사상, 학문 등 다양한 분야에 정통했으며, 특히 건축에 관심이 많아 직접 건축가로 활동했다. 그는 가족의 세대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외부에 표현하기 위해 팔라디오 양식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그는 2년간 머무는 동안 고대 로마와 르네상스로 대표되는 예술 이상주의의 힘을 체험한 후 런던으로 돌아와 건축을 통해 자신과 휘그당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로 결정하여 건축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1720년까지 그는 영국의 팔라디오 건축에 가장 정통한 전문가가 되었다. 이상을 바탕으로 치즈윅 하우스와 조립실의 대표작들을 남겼다.

치즈윅 하우스는 팔라디오의 로톤다를 모방했다. 평면에서 전형적인 모방으로는 정사각형 전체 윤곽, 가운데의 정사각형, 정사각형보다 더 강한 중심성을 가진 다각형, 몸통을 밑면에 놓고 계단으로 접근하는 점이 있었다. 차이도 있었다. 로톤다는 사면에 의해 동등하게 개방되는 교차 축의 명령을 받았다. 반면 치즈윅 하우스는 양면을 막고 앞면만을 강조하는 하나의 축으로 구성되어 있다. 로지아는 그것을 앞쪽에만 보관하고 있었고, 뒤쪽으로 180도 구부러진 한 종류의 앞계단만 사용했으며, 세 바퀴나 회전하고 복잡한 구성이 있는 앞계단 한 종류의 앞계단을 사용했다.


로지아를 대폭 줄인 이 치료법은 전선을 강조한 것이 정치적 집중의 표현으로 보여지는 등 영국의 기후에 맞춰져 있다. 팔라디오의 건축은 영국 상황에 적응되어 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순수한 건축의 관점에서, 그것은 다소 불일치를 야기했다. 몸의 평면 구성을 볼 때 로톤다보다 9등급 분할 순서를 더 강조하여 중심성이 강하지만, 이러한 특징은 계단이나 로지아에 나타난 정면 대조에 반한다. 외모에 비례해 이런 불일치도 나타났다. 로톤다의 외관은 정사각형에 가까웠지만, 건물은 정사각형 평면과 1도에서 2도 반 정도 떨어져 옆으로 널찍한 직사각형 상피로 되어 있었다. 1730년대에 팔라디오 형태가 쇠퇴와 쇠퇴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을 때, 영국의 건축에서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났다. 팔라디오 양식에 대한 비판이 먼저 시작되었다. 영국 사회에 어울리지 않는 정치적 상황의 산물이며, 순수 예술적 용어로 가벼운 피부 스타일이다. 비판은 자연스럽게 18세기의 새로운 영국 스타일을 찾으려는 시도로 이어졌다. 문을 연 사람은 제임스 깁스였다. 출생년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바로크, 팔라디오 스타일, 신고전주의의 혼용을 보여준 과도기적인 건축가였다. 그의 초기 경력은 바로크에서 시작되었는데, 로마에서 공부하여 폰타나에게서 배우고 렌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정권이 바뀌면서 1715년경 팔라디오 양식으로 전환되었으나, 대륙에서 배운 고전적 원리에 입각한 신고전주의 확립을 위해 항해사에 파견되었다. 사막의 대표적인 작품은 성이었다. 마르티노. 6계단, 비슷한 원형 열주전 전면의 전면은 바로크 형태와 팔라디오 형태를 모두 벗어나 보온병 사용에서 생스캄피스를 10년 이상 앞섰다. 그리스 고전주의의 순수함과 원형들을 표현하기 위해 펀치 없는 난방기만을 사용했던 생 스캄피스의 경우도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반면 이 건물은 플라이볼을 갖고 있어 열효과 면에서 생스캄피스에 뒤떨어져 있었다. 이러한 부정적일 뿐만 아니라 이러한 특징 자체가 18세기의 영국의 신고전주의를 대변하고 있었다.



내부도 마찬가지였다. 내부의 기본 구성은 코린트 독립 원형 기둥에서 배럴 볼트 천장을 지지한다는 것이었다. 벽의 구조에서 완전히 해방된 가볍고 합리적인 신고전주의의 전형이었다. 그러나 세부사항에서 볼트의 바닥은 반원 아치에 의해 절단되었고, 실체가 없었다. 그 결과는 루넷 유형의 아케이드를 만든 것으로, 영국에서는 신고전주의의 특징이기도 했다. 깁스 이후 영국 건축은 1760년부터 1970년까지 국제적인 신고전주의에 의해 지배당했는데, 로버트 아담이 주도하였다. 대륙과 교류하고 국제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신고전주의를 기본 트렌드로 삼아 자신만의 다양한 장식주의를 가미했다. 국제적인 추세는 전형적인 종합의 산물이었다. 합성하려는 건축가들이 많았지만, 아담은 다양하고 넓어서 단연 최고였다. 먼저 영국에서 유행했던 바로크, 로코코, 팔라디오 스타일을 습득한 뒤 영국 여행을 통해 자연경관, 조경건축, 고딕양식의 낭만적 감성을 익혔다. 그것은 대륙을 가로질러 다시 여행했고, 그것의 경로는 다양했고, 브뤼셀, 파리, 제노바 플로렌스와 로마로 이어졌다. 피렌체에서는 평생 스승인 클렐리소를 만나 폐허 수채화 운동과 신고전주의를 배우기 위해 함께 로마로 갔다. 로마에서는 고전주의의 긴 역사를 측정하고 그리기 위한 훈련을 했고, 피라네시를 만나 고전주의로부터 낭만적 가능성을 읽는 눈을 배웠다.

카욘 하우스는 아담 스타일의 대표작으로서 아담의 모든 역량을 한데 모은 것이었다. 이 비행기는 팔라디오 로톤다의 중심 동심원 모양을 기본 윤곽으로 삼아 다양한 종류의 방을 추가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크고 작은 직사각형 모양을 바탕으로 사각형, 반원형, 옆면 타원형, 직선형, 비정형형형 등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방들이 차례로 늘어서 있었다. 그 방의 실내 처리도 매끄러운 얼굴, 보온병, 단층, 앱, 이중 기둥과 벽기둥에서 칸, 판넬, 식민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방은 크기, 모양, 실내 가공의 세 가지 요소를 바탕으로 유형적인 개념으로 나뉜다. 우주의 파노라마는 여러 가지 형상을 옆으로 나란히 붙여 형성되었다. 영국의 정서적 주체주의로 재해석된 고대 로마 바로크에서 사용된 연속적인 우주 기법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주문형식의 유형을 방의 특성에 대응하는 기법이었다. 입구 홀은 집의 첫 번째 문이기 때문에 도리스의 사용과 함께 절제된 양식을 갖추고 있다. 대합실은 그 반대였다. 대합실에 들어선 손님들은 더욱 다정한 환영이 필요했기 때문에 장식성이 높은 이오니아식 스타일을 사용했고, 색조도 온화한 범위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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